<초콜릿 도넛>의 이야기
초콜릿 도넛 감독은 트래비스 파인
출연자로는 앨런 커밍, 개럿 딜라헌트, 아이작 레이바
개봉은 2012년 미국
외국 영화의 원 제목은 애니데이 나우, 외국영화의 제목이 원작과 다른 경우, "왜 이 제목이 붙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번역자 또는 유통수입 측. 배급사는 한국 발매에 따라 제목이 바뀔 때가 있는데 약간... 제목이 이해하기 어려습니니다.
제목은 "초콜릿 도넛"입니다.
주인공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좋지만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직접 봤다면, 이 영화는 그다지 감미로운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치열한 시간으로 흐릅니다.
초콜릿 도넛... 마르코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기 쉽게 생각나는 제목인데. 종종 초콜릿 도넛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 영화는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거부당하는 3인의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입니다. 루디, 폴, 마르코
루디는 여자보다 더 여성스럽고, 뛰어난 노래 실력과 아름다운 쇼맨십으로 나이트 쇼 가수입니다.
무대 위에서 루디의 놀랍고 놀라운 퍼포먼스를 멋지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운 증후군으로 마약 중독자의 엄마를 둔 불안정한 환경에 있는 마르코, 다운증후군의 특유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아동의 장애는 사회에서 보호의 필요성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사회는 마르코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의 미소 그것은 그의 행복을 보주고 있습니다.
이웃집에는 마르코(아이작 레이바), 마르코 어머니가 약을 하다가 사라진 이후 혼자 남게 되는데 이때 마르코를 돌보겠다고 자청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함께 따뜻한 생활을 하는 것이 루디입니다,
마르코를 지키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만나게 된 판사 폴(가렛 딜라헌트)입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함께 동거를 시작하고, 마르코의 양육을 위해 함께 힘을 합치게 됩니다.
루디가 어둠 속에서 성소수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며 살고 있다면, 폴은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숨기며, 많은 노력으로 검사가 되어, 그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삶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게이나, 법원이 임명한 존경받는 검사.로 살아가는 쪽이나 나름대로....
영화 전반에 걸쳐 이 내용이 이어지게 되는데, 법정 씬의 치열함과 대조적이게 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눈에 띄어서 더 맘이 아픕니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은 이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마르코가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내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마르코이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아이가 웃을 때 저절로 웃게 되는 묘한 현상과 홀로 남겨진 모습과 당황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볼 때 아려오는 맘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아침 식사로 도넛을 먹고 싶다고 하니까 루디는 "그런 걸 먹으면 여드름이나 생기고, 마르코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잔소리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토라지거나 불평할 것이지만. 마르코는 조용히 루디를 바라봅니다. 마약 중독 때문에 감옥에 간 마르코의 엄마, 루디는 일시적으로 마르코를 데려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법적 신청을 합니다. 그러나 절차는 너무나도 엄격 하합니다.
즉 게이라는 것은 사회에서의 표준에서 탈피하는 특성들 때문에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적 특수성은 범죄나 악의 축이 아닐 진데, 사회 정의는 이들의 마르코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애정마저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지나친 걱정으로 그들을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가장 열받는 부분은 로펌 상사의 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무조건 하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르코를 위해 특별한 학교와 교육까지 신경을 써 주는 루디
그렇게 초콜릿 도넛처럼 마르코, 루디, 폴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랐건만, 세상은 그들이 웃고 행복할 수 있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까요. 우리는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 기준이 어떤 잣대로 어떻게 판단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나요? 정상은 왜 정상이고, 비정상은 왜 비정상인가요?
그리고 비정상은 비판받고 정상에 피해를 줄 영향이 있다고 비난받을 것이고, 질타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판사와 검사는 심의과정에서 " 마르코 앞에서 키스했습니까?" " 마르코를 클럽에 데려갔습니까?" " 마르코 앞에서 여장을 했습니까?"라는 질문들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꼭 해야 만한 질문이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동보호센터 창문에서 보면 마르코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루디를 기다립니다.
그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조금 왜 그렇게 배려심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송이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애가 합니다. 양육권이 아예 친모에게 넘어갔을 때에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 영화 초반부터 줄곧 마르코가 해피엔딩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이것이 반전을 위한 이중 복선이었음을 결말에 가서야 깨닫게 됩니다.
마르코의 행복을 빌며
속았다는 느낌, 영화의 시작에서 나왔던, 마르코가 인형을 안고 거리를 배회하던 모습이 그저 친모 밑에서 살던 때의 불우한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 여겼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습니다.
충격적인 결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아름다운 음악과 색채 덕에 조금이나마 완화되었던 결말의 슬픔이 밀려옵니다. 마르코가 죽었다는 것을.루디와 폴을 찾아 3일 밤낮을 돌아다니다가 다리 밑에서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마르코의 죽음을 알게 된 후, 검은 옷을 입고 처절하게 노래를 부르는 루디의 무대로 영화는 마무리되는데 노래와 연기가 압권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에 내 심장을 더 무겁게 만듭니다.
마르코를 연기한 아이작 레이바 배우는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라고 합니다. 그가 연기가 연기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서 잘 녹아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