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벨파스트 >의 이야기
감독은 케네스 브래너
출연은 주드 힐(버디), 케이트리오나 발피(엄마), 주디 덴치(할머니).....
해리포터의 잘난 척 교수 길 더로이 록하트 역으로 익숙한 '토르 천둥의 신', '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강의 죽음'은 케네스 브래너의 작품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흑백영화 <벨파스트> 관람하기 전 시청하면 좋을 설명서, 제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죠.
벨파스트는 영국의 도시이름입니다.
영국의 공식명칭은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4개의
왕국이 하나로 합쳐진 연합왕국입니다.
벨파스트는 그중에서도 북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영국의 수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라면 이런 배경이나 영국의 구성에 대해서 낯설 것입니다.
북아일랜드는 분쟁지역이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영국 옆에 있는 큰 섬은 아일랜드 공화국입니다. 영국과 다른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섬의 북부지역인 '북아일랜드'는 브리튼 연합왕국의 한 부분으로, 영국의 땅입니다. 원래 아일랜드 땅이었고 아일랜드인들이 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에 의해 착취당하던 지역입니다. 중세시대 아일랜드의 지주는 잉글랜드
귀족들이었고 근대로 넘어가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착취관계로 변화했죠. 아일랜드 대기근을 비롯해 많은
탄압의 역사를 거쳐 1937년 아일랜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룹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북아일랜드는 이미 정착해 있는 잉글랜드계 개신교들이 많아서
반독립파와 독립파의 대립이 심해졌고, 결국 북아일랜드는 브리튼 연합왕국에 남겨졌습니다.
민족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은 겉으로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아일랜드는 게일인, 영국인은 브리튼인이지만 둘 다 같은 켈트족 계열입니다. 오랜 시간 교류가 있어
왔기에 현재는 혈통에 따라 아일랜드인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일랜드인이다라고 정의한다고 합니다. 다만 언어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레'라고 부르는 아일랜드어가 있는데, 조금 다른 사투리 수준이 아니라 통역이 필요한 다른 언어입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동안 아일랜드어 탄압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이후, 아이레를 복원하고 권장하는 운동을 통해 명맥을 잇고 이용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일랜드는 연합왕국에 포함된 만큼 아일랜드 어가 남아 있지만 대부분 영어를
사용합니다. 다만 억양과 발음의 차이가 좀 있어서 아일랜드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가 구분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에는 이런 부분들이 차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종교
영화를 보면 종교에 따른 대립이 나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로 나뉘어 싸웁니다. 대체로 아일랜드계는 천주교, 브리튼계이주민은
개신교를 믿습니다. 또한 아일랜드계는 공화정을 지지하고 노동자 계층이 많아 좌익 성향을 가집니다.
반면 브리튼계는 왕정을 지지하는 우익성향입니다. 이렇게 외모로는 구분이 안 되는 두 집단이 종교와
정치적 성향을 통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이들의 갈등은 단순히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역사적 갈등과 정치적 대립이 담겨 있
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벨파스트는 개신교와 가톨릭신자들이 사는 지역이 나눠져 있고, 사이에 벽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을 통해 평화가 정착된 지금도 종파별로 거주지가 나눠져 있고 장벽이 남아있습니다.
감독
케네스 브래너감독은 벨파스트 출신입니다.
1960년생인 케네스 브래너는 벨파스트의 대립이 심각했던 6~70년대에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
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 꼬마도 감독과 같은 나이대로 설정되었고, 이름도 '버디' 즉 친구, 꼬맹이 같은 이름울 붙였죠.
감독의 어린시절을 담은 만큼 다양한 고전영화들이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지평선', '하이 눈', '리버티 밸런스',
'공룡 백만년', '치티치티 뱅뱅'등 다양한 영화가 직접 나오고 언급됩니다.
그중에서도 1937년작인 <잃어버린 지평선>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샹그릴라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숨겨진 낙원, 이상향이라는 정도만 알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믿는 가공의 왕국 '샴발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영화는 벨파스트의 격정의
시대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직접 나고 자란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써낸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재대로된 배경지식만 있다면 별다른 해석이나 설명이 없어도 영화 속 역사와 인물들의 감정이 잘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미디어
벨파스트는 영국 근대역사에서 매우 격정적이고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때문에 영국의 근현대를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벨파스트를 언급하고는 합니다.
영화 벨파스트는 영국에 대해 알고 나서 보면 그 감동을 더 깊게 느낄수 있는 영화입니다.
민족과 종교와 역사는 현재를
케네스 브래너는 배우로도 유명합니다.
2017년작 덩케르크, 2020년작 테넷같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 크리스틱 초이스 시상식에서
신인배우상, 앙상블상, 각본상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벨파스트에 거주하는 버디(주드 힐)라는 9살 소년의 시점으로 영화는 진행됩니다.
벨파스트에는 앙각,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의 카메라 촬영 방식이 많습니다.
이것은 어른을 바라보는 어린 소년의 시점이 위를 올려다 보는 방향이기 때문이겠죠. 또한 집안에서의 쇼트들에서도 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영화의 성격이 부각됩니다.
버디의 부모님이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버디의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가 돈 문제로 힘들어하는
모습이라든지 등등...어른들의 세계와 그것을 몰래 지켜보는 버디의 모습이 한 화면에 동시에 잡힙니다.
영화가 흑백을 사용한 두가지 이유, 이분법 배격에 대한 이야기, 수학과 과학을 경유한 종교의 무의미,
영화 속에 놓인 여러 다른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 견해입니다.
벨파스트의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은 흑백을 차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가 현재 시점의
벨파스트 구석구석을 담아내다가 담을 타고 넘어가면서 1969년의 벨파스트로 입성합니다. 그러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전환됩니다.
저는 이영화가 흑백을 선택한 이유가
첫 번째 케네스 브래너의 자전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가 다루고 있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경쾌하고 따뜻한 톤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9살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는 공포스러운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영화는 결코 유아적이고 순수한 분위기를 잃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두 집단 간의 갈등의 근원에는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영화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을 보면 모두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선 빌리 클랜튼, 빌리는
굉장히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신자입니다.
버디의 아버지(제이미 도넌)에게 우리와 함께 가톨릭 신자들을 테러하자고 종용하고 지속적으로 협박합니다.
그는 우리가 아닌 상대편은 무조건으로 악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버디의 가족이 주일마다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도 이분법에 사로잡혀있는데 설교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고압적인 인물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세상에는 나븐 길과 좋은 길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렇게 벨파스트는 흑백 논리가 지배적인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흑백이라는 현실을 차용한 것 처럼 보입니다.
벨파스트는 이분법을 배격하는 영화입니다. 우선 버디의 가족이 취하는 자세가 그들은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들이지만 가톨릭을 믿는 타인을 폭력으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인 개신교 신자들의 마트 테러가 발생했을 때 엄마는 버디의 손을 잡고
다시 그 아수라장으로 돌아가서 버디가 훔쳐 온 세제를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혼을 냅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숫자로도 이분법의 무의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버디의 할아버지(시아란 힌즈)는
수학 숙제를 하던 버디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합니다.
답이 되는 숫자를 애매하게 써서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게 해 봐라. 실제로 보디가 시험에서
그렇게 하니까 반에서 2등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니 벨파스트는 세상엔 단 하나의 답만 있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인 것입니다.
벨파스트는 변증법에 의거해 정반합에 도달하고자 하는 영화입니다. 0아니면 1 오직 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3이라는 절충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끝자락에 이 영화를 어떤 분들에게 바칩니다 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벨파스트는 애초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벨파스트에서 버디가 학습하는 중요한 두 과목은 수학과 과학입니다. 영화에서는 그 둘을 경유한 여러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수학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 드린 할아버지와의 대화도 있고 숫자들이 쇼트 혹은 대사를 통해서 간헐적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버디의 집 주소를 지칭하는 96이 문에 붙어 있는 쇼트라든지, 버디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집을 문에 붙어 있는 숫자 8이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한다든지 등등이 그렇습니다.
과학에 대한 표현은 달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달에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발표 수업이
있어서 그것을 준비한다든지 할아버지가 버디의 가족들이 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을 달로 향해 가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는 방식으로 묘사가 됩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수학과 과학이라는 것은 이성의 세계일 것이고 실험과 증명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세계입니다. 수학과 과학의 세계는 어떻게 보면 종교라는 초현실적인 세계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벨파스트는 어린아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들이 수학과 과학을 학습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은 창작자가 수학과 과학을 학습한 아이들의 어른이 된 세계를 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성이 작동하는 합리적인 세계를 희구하고 있다고도,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종교의 세계는 무의미하고 무용해지는 것입니다.
영화가 한 종교가 다른 종교 사람들의 집을 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설정 자체에서 이미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영화에서 버디가 관람하는 여러 영화들 <공룡 100만년, 1966>, <치티 치티 뱅 뱅, 1968>은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하이 눈, 1952>,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는 TV를 통해 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연극도 한편 접합니다. 먼저 컬러로 묘사되는 작품들 극장에서 보는 두 편의 영화와 할머니(주디 덴치)와 함께 보는 한 편의 연극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버디에게 영화는 판타지이고 삶의 거대한 유희 중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소년의 감흥을 시각화하기
위해 컬러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흑백의 세계에서 컬러는 초현실일테고 실제로 저 영화들이 컬러 영화이기도 합니다.
버디의 아버지가 위급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빌리 클랜톤에게 벽돌을 집어던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버디의 형인 윌의 머리에 올려진 공을 다른 공을 던져서 맞추던 장면과 연결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들과 놀아주던 방식으로 적을 처단하고 있는 것이니 굉장히 어린아이의 세계에 걸맞은 방식
입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영화의 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